숲 (시인의 동네서점 분투기 - 시읽는 책방)

글 | 책방이듬 대표 김이듬
김이듬

-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부산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경상대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 계간『포에지』로 등단했다.
시집『별 모양의 얼룩』『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베를린, 달렘의 노래』『히스테리아』『표류하는 흑발』과
장편소설『블러드 시스터즈』, 산문집 『모든 국적의 친구』『디어 슬로베니아』등이 있다.
현재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출강, <책방이듬> 대표. 

어느 날 문득 당신이 나를 숲에서 만난다면 손을 내밀까요?
어느 오후 당신이 짙어가는 초록 숲 사이로 밝은 빛처럼 다가온다면 나는 눈이 부신 사람처럼 눈을 깜빡거릴까요? 우리가 새들처럼 날개를 벌릴까요?

나는 매일매일 숲을 바라보지만 그곳에 갈 수 없어요. 여기서 숲까지는 백 보 남짓이지만 천 리보다 멀게 느껴져요. 저녁의 숨결이 낮게 드리워질 때 노을로 붉어지는 숲과 그 너머 어둠을 바라봅니다. 일몰이 완전해지면 오늘도 나는 유리창을 닦지 않았다는 걸 자책합니다. 햇볕과 신선한 바람을 쐬게끔 내어둔 화분을 들여놓습니다. 나에게로 와 죽어가는 화초를 만져봅니다. 지상 어디든 갈 수 있었을 텐데, 테이블에 내려앉은 먼지를 닦습니다. 책에 묻은 얼룩은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내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은 그냥 내버려둘 때도 있어요. 

이틀 연달아 종일토록 비가 내렸습니다. 오월 중순인데 천둥까지 동반한 장맛비였어요. 그날은 낭독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몹시 서성거리며 걱정했어요. 비가 오면 객석이 텅 비곤하거든요.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의자가 모자라서 보조의자들을 펼칠 정도로 책방은 인파로 넘쳤어요. 밤 열 시까지 우리는 시를 읽었습니다. 어떤 이는 짧은 시를 천천히 읽었고 어떤 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꽤나 긴 시를 읽은 후에 내밀한 얘기를 시작했어요. 창가에 앉은 이는 빗소리를 들었을 겁니다. 아름다운 밤이었어요. 아름다운 것은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아요. 그것이 달콤한 위안이나 삶의 해답을 주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 읽는 저녁을 좋아해서 한 달에 두어 번씩 낭독회를 주최합니다. 벌써 20회가 넘어가네요. 시를 읽거나 시를 짓는 건 부질없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에게 하루하루 버틸 힘을 줍니다. 시를 느낄 수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이 부조리하며 치졸한 행성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그 순간, 그 아름다움은 내 마음정원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의 뿌리나 물관 같은 거예요. 

책방에서는 책을 읽는 사람, 노트북 펼쳐 작업하는 사람,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림 그리는 모임, 글쓰기를 하는 모임, 영어원작을 읽는 모임, 와인과 인문학을 결합한 모임도 꾸려지고 있어요. 어제는 책방에서 사진 강좌를 열어보겠다며 들른 포토그래퍼도 있었어요. 나는 그들과 헤어질 때 책방 문을 밀어주며 말하곤 하죠. “책방 정원에 들렀다가세요. 저의 호수도 있으니 한 바퀴 산책하고 가셨으면 좋겠네요.”

오늘은 산책하기 좋은 날씨입니다. 모처럼 쾌청한 봄날이지만 나는 책방 바닥 청소를 해야 합니다. 어제 늦게까지 북미회담에 관한 얘기를 나누느라 뒷설거지도 못한 채 퇴근했거든요. 바닥에는 물이 차오르는 부분이 있어요. 비가 종일 퍼붓던 날에는 물이 흥건했다는 걸 건물주한테 얘기해야겠어요. 나의 처지는 첨벙첨벙 바닥을 치고 있네요. 체력과 부채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개를 땅에 묻고 하늘로 갔다고 믿는 사람처럼 바닥을 파내려 가다보면 파라다이스에 닿을 수 있을까요? 하늘을 날아서 나의 개와 나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난생처음 사업장을 열었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만나가며 축생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기의 어려움과 행복을 맛봅니다. 한겨울 아침의 숲, 그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를 아슬아슬 잠시 걸어본 후로는 아직 나의 숲을 향해 한 발짝도 옮기지 못했네요. 사람의 숲, 책의 숲인 책방 안에서 자발적 수감자로 충실히 사느라 너무 바빠서요. 내가 관리하지 않아도 깨끗하고 광활하며 호화로운 자연의 숲, 책방이듬의 대정원-사람들은 일산호수공원이라고 칭하지만- 조만간 나의 숲으로 소풍 나갈 겁니다. 맞은편이 숲인데 오 분 내로 닿는데… 그런 날도 오겠죠. 호숫가에 앉아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거든, 그녀 정수리 근처에 곰팡이 핀 하얀 접시가 번지거든 나인 줄 아세요. 아우라가 아니에요. 만일 호수 안으로 천천히 걸어가거든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