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어울리는 영화 3편

글 / 김경민(영화감독), 에디터 / 김지선(순천향대학교 부천병원 외과)
김경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연출전공
영화 시나리오 작가
웹툰 스토리 작가
현재 장편영화 감독 데뷔 준비 중
프로필

가을은 다양한 감정을 안겨주는 계절이다. 여름과 겨울의 틈바구니에서 고작 2주짜리라도 충분하다. 우리는 얼마든지 센티멘탈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럴 땐 그에 맞는 작품이 있다. 재미있고 접근성이 좋으면서, 교양있는 자리에서 대화 소재로 꺼내기도 좋은 영화로 골라봤다.
내용에 대한 언급이 들어가니 스포일러에 예민한 분들은 영화를 보신 후 일독을 권한다.  




결혼 이야기 < Marriage Story, 2019 >
감독 : 노아 바움백
출연 : 스칼릿 조핸슨, 아담 드라이버


단언컨대 <결혼 이야기>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다. 감독 노아 바움벡의 필모에서도 제일 돋보이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미리 밝히자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는 제목과 반대다. 달콤한 로맨스물을 기대한 분들이 엄혹한 광경에 당황하실까 봐 미리 귀띔한다. 이 감독은 명사(셀럽)의 일상을 소재로 한 영화를 종종 만들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 역시 배우와 연극 연출가로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는 결혼의 끝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공감을 끌어낸다. 자수성가한 유명인이지만 그들도 인간이며 아버지이자 어머니고, 여자이자 남자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공간의 대비를 통해 두 주인공이 지향하는 바를 드러낸다. 환한 햇살의 LA에서 근사하게 그을린 사람들과 영화 일을 하는 니콜, 수직적이고 밀도 높은 도시 뉴욕에서 가족적인 분위기로 연극을 만드는 찰리. 뜨거운 열정이 그들을 함께 하게 했지만 애초에 그들은 두 도시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이다. 


결혼 이야기

영화 속에서 찰리는 끔찍한 과정을 겪는다. 이혼 재판이 LA에서 열리는 탓에 돈과 시간을 길바닥에 뿌려야 하고 어린 아들과는 점점 거리가 생긴다. 하지만 영화는 니콜을 ‘썅년’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니콜이 결혼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내했는지가 잘 드러난다. 영화는 기가 막힌 밸런스로 두 인물의 중심에서 누구도 비난하거나 편들지 않는다. 두 주인공의 매력을 아낌없이 드러내면서도 담담히 이혼의 고통과 괴로움을 보여준다. 이 지점이 이 영화의 가장 높은 성취일 것이다. 누가 그랬는데 이혼은 지옥보다 더한 지옥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이별은 있을지 몰라도 우아한 이혼은 없다. 이혼의 과정에서 자신의 바닥을 보고 상대의 바닥을 본다. 이런 상황에선 아무리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라도 처참한 자기혐오와 저열한 증오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열렬히 사랑했던 관계인데 말이다! 어쩌면 이건 깊이 사랑했기에 겪는 고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이혼을 대리로 체험하게 해준다. 소설, 영화를 통틀어서 이렇게 생생하게 ‘간접이혼’을 경험하게 해주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결혼과 어떻게든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보길 권한다. 사후 지옥은 영영 모르겠지만 이혼의 지옥은 이 영화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직접 겪으면 더 끔찍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결혼은 계속 달콤할 수 없고, 예방주사는 맞아야 더 큰 고통을 피할 수 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 The Florida Project , 2017 >
감독 : 션 베이커
출연 : 브루클린 프린스, 윌렘 대포, 브리아 비나이트


가난은 무슨 색일까?
감독 션 베이커는 이 질문에 플로리다의 눈 부신 햇살이 어루만지는 알록달록한 모텔촌으로 대답한다. 거기에는 어린 소녀가 어린 엄마와 살고 있다. 주인공 무니의 일상은 꽤 즐거워 보인다. 디즈니랜드 근처에 사는 소녀라면 당연한 일일까? 그래서 이 영화는 더 처연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우리는 가난을 고정된 이미지로 파악해 일종의 기호처럼 대할 때가 있다. 그런 경우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복지카드로 ‘고오급 정통일식 돈가스’를 사 먹는 아이들이 불편해 화가 난다. 어째서 돈도 부모도 없는데 저렇게 웃는 얼굴로 내가 먹는 것과 같은 비싼 돈가스를 (나랏돈으로, 내 세금으로!) 사 먹는 거지? 저것은 ‘가짜 가난’ 아닐까? 가난이란 모름지기 허름한 옷차림에 간신히 죽이나 먹으며 우울해해야 하는데 말이지.
하지만 헐벗고 굶주리는 가난은 1단계(일 소득 2달러 미만)나 2단계(일 소득 8달러 미만) 국가의 모습이지 4단계(일 소득 32달러 이상) 국가인 미국이나 우리나라에선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미국(혹은 한국)의 가난은 SPA 의류로 가려지고, 할부 구매한 스마트폰으로 감춰진다. 심지어 기부되는 유통기한 지난 화려한 케이크와 도넛으로 비만이 되기 쉬운 게 부자나라의 가난이다. 이런 세상에선 명품으로 온몸을 두른 유한계급은 한눈에 찾아도 헐벗고 굶주리는 ‘전형적인 가난’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는 선진국이라 불리는 부유한 나라의 가난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그 가난의 와중에는 인류 보편의 정서가 듬뿍 들어있다. 사랑, 기만, 질투, 행복 등등 모든 색의 감정들 말이다. 마치 가난하면 우울하기만 할 거라는 착각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 같다. 감독이 알록달록한 색감을 강조한 건 이런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결코 편하게 볼 수 없는 영화다. 필자는 이런 부류의 작품을 ‘가장자리 영화’라고 부른다. 마침내 정의가 승리하는 블록버스터나 불굴의 의지로 고난을 극복하는 인간승리 드라마가 영화감상의 가운데 토막이라면, 불편한 진실을 돌아보게 만들거나 독특한 시각적 경험으로 관객의 영화적 경험을 확장시켜주는 영화, 즉 경계, 가장자리에서 '요기까진 괜찮지?'라며 관객의 관람 가능 경계선을 점점 넓혀주는 그런 영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영화는 ‘가장자리 영화’의 좋은 예다.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카메라워킹, 비전문 배우들의 야생동물 같은 연기 등 신선한 요소로 가득하다.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익힌 것 없이 손으로 찢어 만든 터프하고 예쁜 샐러드랄까? 공산품 같은 영화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가을의 영화 식탁에 올려보길 권한다. 현재(2021년 11월 기준) 넷플릭스와 왓챠에서 감상할 수 있다.  




캐롤 < Carol , 2015 >
감독 : 토드 헤인즈
출연 :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카일 챈들러


모든 사랑은 시선에서 시작된다. 두 여자는 한 공간에서 서로를 훔쳐보다 눈을 맞추고 마침내 다가간다. 별거 아닌 순간들이 중첩되면서 그들 사이에서 호감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데, 관객인 우리는 그것을 실제로 볼 수 있다! 다양한 영화만큼 다양한 관객이 존재한다. 어떤 관객들은 영화 ‘본’ 시리즈의 액션 장면을 다 이해한다. 그 현란한 움직임을 전부 파악해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어떤 관객은 그게 잘 안된다. 화면이 어지러워서 누가 누굴 때리는 건지 헷갈린다. 멜로물이나 로맨스 영화의 감정선도 비슷하다. 누구는 그 미묘한 감정들을 쉽게쉽게 탁탁 이해하지만, 어떤 관객은 ‘아니, 갑자기 왜 언제부터 저 둘이 좋아했대? 나만 쏙 빼놓고~’라며 불만을 터트릴 수 있다. <캐롤>은 은근뭉근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으로 가득한 영화라 거기에 취하지 못하면 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다 비슷하다. 조금만 열심히 보면 맷 데이먼의 주먹이 누굴 때리는지 알 수 있고, 캐롤과 테레즈의 감정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 이 영화의 즐거움이 있다. 영화 <캐롤>은 마음만 먹으면 칭찬으로 몇 페이지를 빼곡히 채울 수 있는 훌륭한 영화다. 종합예술이라는 영화의 특성을 잘 활용해서 모든 프레임, 모든 사운드트랙이 아름답다. 심지어 필자 같은 경우엔 공감각적 경험까지 했다. 영화의 특정 장면에서 독하다 싶을 정도의 짙은 향수 냄새를 맡은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캐롤

이렇게 훌륭한 영화지만 아쉽게도 완성도만큼 상복이 따르지 않았다. 물론 좋은 영화라도 운이 나쁘면 수상이 적을 수 있지만, 운보다는 여성 중심 영화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처럼 느껴지는 측면이 있어 개인적으로 아쉽다. 개봉한 해의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건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싶다. 이 영화를 볼 때 두 주인공의 첫 식사 장면에 주목하길 바란다. 성적긴장감이 이렇게 높은 장면은 최근에 본 기억이 없을 정도다. ‘야하다’는 느낌은 실제적 노출보다 마음의 긴장이 더 중요하다는 걸 씬으로 증명한다. 또한, 누구나 감탄할 수밖에 없는 건 엔딩이다. 독자들의 신선한 감상을 위해 더 언급하진 않겠지만,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아아-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올 것이다. 왓챠에서 서비스 중이니 가을에 어울리는 걸작 로맨스 영화를 편안하게 즐기시길 바란다. 향이 좋은 술과 함께하면 더욱더 멋진 감상이 될 것이다.